이오텍스

그의 호는 다산(茶山)과 더불어서, 사암(俟菴)·채산(菜山)입니다.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이라고 하며,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답니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한 뒤에,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 등 전체가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답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정말로 새롭게 할려고’ 노력하였답니다. 정치와 아울러서, 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서 전개되었던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였으며,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하게 됨으로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답니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답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다르게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답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답니다.